역사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와 1천 일본 군경에 맞선 3시간 결사항전, 의열단원의 생애와 업적·오늘 본받을 점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와 1천 일본 군경에 맞선 3시간 결사항전, 의열단원의 생애와 업적·오늘 본받을 점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은 1923년 1월, 일제 탄압의 상징이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서울 한복판에서 수많은 일본 군경에 맞서 홀로 싸우다 순국한 의열단원이에요. 마지막 날 그는 1천 명에 이르는 일본 군경에 포위된 채 세 시간 넘게 총격전을 벌였고, 끝내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김상옥의 생애와 활동 연표, 철공소 청년에서 독립운동가가 되기까지, 혁신단과 암살단,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와 서울 시가전,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까지 정리했어요.

📌 한 줄 요약 — 가난 속에서 스스로 배우고 일어선 철공소 청년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맨몸으로 일제 경찰의 심장부에 뛰어든 이야기입니다.

👤 한눈에 보는 김상옥

항목 내용
출생~사망 1889년(1890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음) ~ 1923년 1월 22일
출신 서울 동대문 근처(지금의 종로구 효제동 일대)
소속 혁신단, 암살단, 의열단
대표 활동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서울 시가지 결사항전
서훈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철공소 청년, 스스로 배우다

김상옥은 서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일을 하며 자랐어요. 낮에는 대장간과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며 스스로 배움을 이어 갔다고 전해져요. 그는 이렇게 익힌 기술로 철물점을 운영하며 자리를 잡았고, 우리 손으로 만든 물건을 써야 한다며 국산품 쓰기에도 앞장섰습니다.

배움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았던 그는 동네에 야학을 열어 청소년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생활 속에서 시작된 그의 활동은 점점 나라를 되찾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 생애와 활동 연표

아래 연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했어요. 일부 연도와 숫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전합니다.

연도 주요 내용
1889년 서울 동대문 근처에서 태어남
1910년대 철공 일을 하며 야학을 열고 국산품 장려 활동
1917년 무렵 비밀 결사 혁신단을 만들어 항일 신문을 펴냄
1919년 3·1운동에 참여
1920년 암살단을 꾸려 일제 고관 처단을 계획, 발각되자 상하이로 망명
1920년대 초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
1922년 말 국내로 몰래 들어옴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3년 1월 17일 은신처를 포위한 일본 경찰과 교전 뒤 탈출
1923년 1월 22일 효제동에서 일본 군경 1천여 명에 포위, 3시간여 총격전 끝에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혁신단과 3·1운동

1917년 무렵 김상옥은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비밀 결사 혁신단을 만들어 항일 신문을 펴내며 독립 의식을 일깨웠어요. 1919년 3·1운동 때는 만세 시위에 함께했고, 시위대를 탄압하는 일본 경찰에 맞서 사람들을 구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3·1운동 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는 말과 글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 암살단에서 의열단으로

1920년 김상옥은 암살단을 조직해 일제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러나 계획이 일본 경찰에 알려지면서 동지들이 붙잡혔고, 그는 중국 상하이로 몸을 피했습니다.

상하이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만나고, 김원봉이 이끄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에 가입했어요. 의열단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그 책임자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벌인 단체예요. 김상옥은 국내의 일제 기관을 직접 공격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올 결심을 합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1922년 말 무기를 지니고 몰래 서울에 들어온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어요.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하던 곳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일제 탄압의 상징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의거로 서울 시내는 발칵 뒤집혔고, 일제 경찰은 범인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어요.

⚔️ 서울 시가지의 결사항전

1월 17일, 은신처에서의 첫 교전

닷새 뒤인 1월 17일, 은신처가 드러나 일본 경찰이 집을 둘러쌌어요. 김상옥은 홀로 총을 들고 맞서 형사들을 쓰러뜨린 뒤, 눈 덮인 남산을 넘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고 전해져요.

1월 22일, 마지막 세 시간

며칠 뒤인 1월 22일 새벽, 효제동의 은신처가 다시 발각되었어요. 일제는 이번에는 1천 명에 이르는 군경을 동원해 마을 전체를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지붕과 담을 넘나들며 세 시간 넘게 홀로 맞서 싸웠어요. 많은 일본 경찰이 다치거나 쓰러졌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 남은 총알이 떨어질 무렵, 그는 적에게 붙잡히지 않겠다는 뜻을 지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어요.

🏅 김상옥의 업적 정리

업적 의미
야학·국산품 장려 생활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우려 함
혁신단 활동 항일 신문으로 독립 의식을 널리 알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일제 탄압의 상징을 직접 공격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보여 줌
서울 시가지 결사항전 1천여 군경에 홀로 맞선 싸움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

🌱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

1. 환경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배우는 자세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지만, 그는 일하면서 밤에 공부했어요. 그리고 배운 것을 다시 이웃과 나누려 야학을 열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는 힘은 결국 스스로 배우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줘요.

2. 일상에서 시작하는 실천

국산품을 쓰고, 이웃 청소년을 가르치는 일처럼 그의 독립운동은 생활 속 작은 실천에서 시작됐어요. 큰 뜻도 오늘 할 수 있는 일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어요.

3. 끝까지 굽히지 않는 용기

수없이 많은 적에게 둘러싸인 순간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두려움 속에서도 옳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지킨 용기는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4.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기

김상옥이 몸을 숨기고 싸울 수 있었던 데에는 그를 숨겨 주고 도운 가족과 동지들이 있었어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의거 뒤 붙잡혀 고초를 겪었습니다. 독립운동은 이름이 남은 몇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해요.

🕯️ 김상옥을 기억하는 곳

장소 내용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서울 종로구)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서 있어요
국립서울현충원(서울 동작구) 독립유공자로 모셔져 있어요

※ 관람 정보는 방문 전에 확인하세요.

다른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김경천, 남자현, 김순애, 신돌석 글에서 볼 수 있어요.

❓ 자주 묻는 질문

Q.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요?
A.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 등이 만든 무장 독립운동 단체예요. 조선총독부·경찰서 같은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침략의 책임자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벌였어요.

Q. 종로경찰서는 왜 공격 대상이 되었나요?
A. 서울의 독립운동을 감시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하던 곳이라 일제 탄압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Q. 정말 1천 명에 포위되었나요?
A. 당시 일제가 대규모 군경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흔히 1천여 명으로 전해져요. 정확한 인원과 일본 측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어요.

Q. 김상옥의 서훈은 무엇인가요?
A.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어요.

마무리하며

김상옥은 철공소에서 일하던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나라를 잃은 현실 앞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맞선 독립운동가였어요. 일제 경찰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고, 1천여 군경에 홀로 맞서 끝내 무릎 꿇지 않은 그의 마지막 세 시간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등의 공개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습니다. 출생 연도, 포위 인원, 사상자 수 등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 경우가 있어, 학술적으로 인용할 때는 원문 자료를 함께 확인하세요.

#김상옥#김상옥 의사#의열단#종로경찰서 폭탄 의거#혁신단#독립운동가#순국선열#대통령장
목록